Playground/양태성

익숙한 서글픔

갱(조경숙) 2011. 5. 12. 18:22
익숙한 서글픔



집에 들어왔다. 지금 시각이 밤 12시 48분.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비례대표제를 지지하느냐? 이런 물음에 앞서 내가 배설을 좀 해도 되겠는가? 그래 이건 설사다. 

선거제도하면 떠오르는 생각들을 브레인스토밍 해본다. 레이파트, 헤어니마이어, 뜨레셜드, 비례대표제, 단순다수제, SNTV, 결선투표제, 비례성, 등가성 등등. 

나는 비례대표제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좋은 사회를 지지한다. 지극히 주관적이고, 협애한 개념으로 좋은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풀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에 나의 현실이다. 나는 잠실역에 쪼그려 앉아서 껌을 파시는 할머니가 한국사회의 보호를 받아야한다고 생각한다. 왜냐고? 그 할머니가 내 미래의 아내의 모습일수도, 또 내 딸의 모습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이기적인 동기일지라도...

좋은 사회란 무엇인가? 어려운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함께 사는 사회는 그 누가되었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사회이고, 그것을 보장할 수 있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 글을 끄적이는데, 왜 이렇게 서글픈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당연한 것을 어렵게 시도해야만 하는 이 현실이 대신 답이 될런지는 모르겠다. 

나와 관계된 사람이든 아니든,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다르게 생겼다. 또 그들의 삶도 가지각색이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점에서 동일할 뿐, 그 누구와도 동일하지 않다. 우리의 삶 또한 그 어떤 것으로도 환원될 수 없다. 이런 것을 흔히 독특하다고 얘기한다. 여기서 다시 한번 묻는다. 좋은 사회란 무엇인가? 

한국의 선거제도를 굳이 말하자면, 소선거구 1위 대표제이겠다. 익숙하게도 다수결이란 것이다. 민주주의는 곧 다수결.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의 인식에 비례대표제는 상당히 멀다. 득표율이 30%이던, 40%이던 내가 지지한 인간이 선거에 진다면 그렇게도 독특한 30% 또는 40%는 정치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지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기서 익숙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무서운 것이다. 산업화 시기 사회에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것이 어렵다는 이야기처럼 무서운 이야기이다. 그것이 결코 인과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익숙함이 던지는 무서움이다. 비례대표제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우리는 이러한 익숙함 앞에 대면해야만 한다. 비례대표제는 운동만으로 이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비례대표제는 좋은 사회를 이루기 위한 하나의 당연한 도구이다. 그것은 곧 익숙함을 걷어내야만 하는 작업, 스스로 쇄신되어야만 하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이 쇄신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 마지막으로 묻는다. 당신이 생각하는 좋은 사회란 무엇인가?

비례대표제, 그 당연한 도구의 일환을...
why n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