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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yground/갱

페미니스트인 나는 왜 비례대표제를 지지하는가

페미니스트인 나는 왜 비례대표제를 지지하는가



인쇄된 활자에도 두께가 있다. 손에 힘을 뺀 채로 손가락을 활자 위에 천천히 올려놓으면 책에 인쇄된 활자들이 손가락 끝에서 오돌도돌 만져진다. 페미니즘은 내게 이런 것이었다. 시각뿐만 아니라 언제나 촉감으로까지 맞닿는, 그것도 항상 몸의 가장 끝자락에서 만날 수 있는, 소통의 정수(淨水).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이 때문이었다. 물론 마초를 반경 100m 내로 접근하지 못하게 하거나 섣부른 꼰대 짓을 사전에 차단하는 부가 효과도 있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타인과 나의 높이를 동등하게 맞추는 것이 핵심이었다. 어린 여자아이라는 입력 수치 안에서 부엌때기로 가라앉는 나 자신을 일으켜 세우고, 선후배라는 위험한 관계에서 나도 모르는 새 공중 위로 떠버리는 것을 경계하는 것. 당신과 나의 차이를 많고 적음이 아니라 수의 다름으로 인식하는 것. 그러니까 내게 페미니즘은 어떠한 정치적 입장이라기보다 기본적인 인간적 예의의 차원인 셈이다. 당신과 나의 만남에 있어 개재된 이물질들을 퍼내고 서로의 목소리를 보다 투명하게 닿게 하는 하나의 ‘듣는 귀’로서 말이다.
 

‘정치’를 협소한 의미로 해석한다고 했을 때, 나는 페미니즘이 정치적 입장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개개인마다 전유하는 페미니즘의 의미가 다르므로 섣부르게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게 있어 페미니즘은 정치적 우파․좌파의 구도를 넘어 그 안에서 기본적으로 지켜져야 하는 ‘인간에 대한 예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을 근거로 한국 사회를 바라보면 어떠한가. 한국 사회가 아니더라도,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세계는 극히 절망적이다. 이집트 혁명 이후에 함께 광장에서 혁명을 외쳤던 여성 ‘동지’들은 혁명이 끝난 이후 가부장의 방 안에 감금되었고, 리비아의 트리폴리에서 정부군에게 납치되었던 여성은 외신기자들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당신의 아비는 누구냐는 질문만을 받은 채 다시 포로로 붙들린 것이다. 한국 사회 역시 이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촛불집회 때도 젠더 문제는 번번이 제기되었고, 게다가 여성을 위한다는 서울시는 얼마 전 양성 평등을 위해 신호등을 전면 교체하겠다는 정책을 발표하기도 했다. ‘왜 모든 표준은 남성으로 되어있을까?’하는 그들의 인식과 문제 제기는 정당한 것이라고 하여도, “신호등 전면 교체”라는 뜨악한 해결 방안은 오히려 합당한 고민 자체마저 반감의 대상으로 만든다. 앞 선 예시들은 의식의 차원에서 페미니즘적 감수성이 부족했다면 후자는 정책, 문제를 구체적으로 풀어나가는 해결 방안에 있어서 다양한 계층들의 동의 획득, 혹은 의견 수렴이 결핍되어 있던 안타까운 사례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내가 직면하는 실질적인 문제는 페미니즘적 감수성을 어떻게 사회의 인식적 차원에, 그리고 정책적 차원까지 반영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답은 쉽지 않았고, 다만 공부의 과정 중 얻게 된 탐구 과제가 하나 있었을 따름인데, 그 탐구 과제는 바로 ‘비례대표제’였다. 이것은 내가 페미니즘에 대해 갖고 있는 인식과 마찬가지의 위치로서, 유권자들의 말에 동등한 힘을 실어주는 기제로 작동한다. 이를테면 ‘인간에 대한 예의’의 차원에서 말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색은 청색 아니면 적색으로 양분화 되어 있다. 공적 공간에 입성하기 위해서는 나의 색을 보다 가까운 쪽에 우겨넣는 수밖에 없고, 그것이 아니라면 아예 배제당하는 구조인 것이다. 그러니 손끝으로 느낄 수 있는 민감함들, 세세한 차별들이 적절하게 반영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정말이지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기 일쑤였던 상황 속에서 목청껏 소리 지르지 않아도 나의 목소리가 누군가에게 전달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 비례대표제는 각각의 볼륨에 상관없이, 아무리 작은 의견이라도 그것 자체로 소중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제도다. 비록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낮은 비율로 운영되고 있긴 하지만 이것이 보다 확대되어 시행된다면 정말이지 넓은 스펙트럼의 색깔들이 공론장에 나설 수 있게 될 것이다. 당신의 불편함이, 그리고 우리의 감수성들이 ‘바깥’이 아니라 공동체의 안쪽에서 발언권을 획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n명의 페미니스트, n개의 페미니즘.’. 내 대학생활의 모토는 이것이었다. n명의 페미니스트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일한 페미니즘의 거대한 뭉텅이가 아니라 각각의 사람들이 나름대로 보유하고 있는 n개의 페미니즘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n명의 사람이 살아가는 이곳에는 n개의 몸이 있다. 당신과 나의 몸이 다르듯이. 비례대표제는 이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수천, 수만 가지의 몸들이 그 고유의 돌기를 가진 채로 살아갈 수 있다고, 살 뿐만 아니라 이제 정말 말할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