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정치화된 청년들이 '정치효능감'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며 정치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시민들의 자발적 흐름에 응답하지 못하는 정치권의 개혁논쟁
언제부턴가 청년들이 정치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90년대 중후반 이후 그러니까 대학생이 주축이 된 청년들의 ‘거리의 정치’가 사그러들기 시작하면서 청년들, 또는 2030세대는 ‘탈정치’의 대명사가 되어버렸다. 선거가 끝나고 나면 늘 젊은 층의 무관심을 질타하는 사설과 기사들이 줄을 이었고 청년세대가 정치에 관심이 떨어지는 것이 사회에 관심이 없다는 식의 논리로 이어가기도 했다. 이는 언론, 학계, 그리고 정치권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갑자기 선거의 최대 변수가 청년세대가 되어버렸으며 이번에 출마한 대선후보들 역시 너도나도 청년들에게 어필하려 한다. 혹자들은 이런 현상을 두고 시니컬한 태도를 계속 견지한다. 하나는 여전히 청년들이 정치에 관심이 없다며 비판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정치권이 선거 때만 관심을 보이고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정치가 청년들에게 이렇게 가까이 다가온 적이 있었는가?”라고 묻고 싶다. 사랑이나 가족이든 혹은 그것이 정치라는 것이라도 가까이에 있어야 참여하고 쓰다듬고 비판이라도 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그것이 선거 때 반짝 표를 얻기 위한 이벤트일지라도 여전히 절반에 달하는 청년들이 투표를 하지 않는 현실이라고 하더라도 청년과 정치가 교감하고 갈등하고 긴장 하는 모습이 좋다. 무엇보다도 다음세대로서 사회의 주역이 되어야 할 세대가 정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다.
정치가 청년들에게 가까워지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많은 청년들이 한 사회가 공동체가 어떠한 방향으로 가야하는가를 놓고 갑론을박을 벌이기 시작했다. 아직은 뿌옇게 흐리기만 하지만 무언가 들끓고 있는 그 에너지를 대변할 새로운 인물을 찾아 연예인 팬 마냥 부유하기도 한다. 이것은 어쨌든 한국정치에 새로운 에너지가 유입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물론 사회개혁을 바라는 입자에서는 이 에너지가 고질적인 한국정치의 문제점들을 개혁하는 방향으로 이용되고 또 그것이 정치를 거쳐 한 사회의 사회경제적 문제들을 구조적으로 해결하는 수준까지 나아가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문제는 오히려 다시 정치에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이 새로운 에너지를 내뿜는 청년들이 아직 구체적인 방향과 상을 잡고 있지 못한 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시민들의 자발적 흐름에 응답하지 못하는 정치권의 개혁논쟁은 또 심지어 그것을 일종의 반정치의 정치로 활용하는 태도들은 너무나 무책임하다. 지금 시작된 정치개혁 논쟁은 오히려 저기 여의도에 또는 효자동에 있는 어떤 권력을 탁자에 올려놓고 요리조리 해부하고 재조립하는 광경을 국민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쇼로 진행되어서는 안 된다. 보여주어야 하는 것은 정치가 바뀌면 어떻게 사람들의 삶이 바뀔 수 있는지 그리고 청년세대의 정치참여에 대한 에너지가 어떻게 의미 있게 활용되고 다시 그들 스스로에게 돌아올 수 있는지 이다. 단 한번도 제대로 된 정치효능감을 느껴보지 못한 지금의 청년세대에게 작금의 정치개혁 논쟁은 사실 매우 중요하다.
한 쪽에서는 반정치의 프레임으로 오히려 젊은 세대를 선동하며 가까스로 청년들 곁으로 다가온 정치를 저 멀리 떠나보내려 하고 있고 다른 한 쪽에서는 지역주의 타파를 정치개혁의 주요한 화두로 상정하려는 듯 한 모습을 보인다. 지금 비례대표제 확대와 정치개혁을 둘러싼 대선후보들의 논쟁의 양상이 그러하지 않을까? 언제부턴가 TV에서는 아이돌 연예인들의 댄스음악만 주구장창 나온다. 그러나 더 많은 대중들이 바라는 것은 다양한 음악들이 공존하고 자신의 기호에 맞는 음악들을 선택할 권리이다. 댄스음악 위주의 현실이 잘못되었다고 갑자기 음악방송 자체를 없애버리는 식은 아니지 않을까?